2018년 ‘북한 김정은의 핵 심리’로 박사학위 받았으나 취직 안돼
아내 외조하며 베스트셀러 《레이건 일레븐》 번역
영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2006년 귀국해 군에 입대했다. 겨울에도 별로 춥지 않은 인도와 영국에서 살다가 강원도 화천에서 근무하려니 너무 추워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한국말 발음이 이상해서 군대 선임들한테 많이 혼나기도 했어요. 덕분에 발음이 교정됐죠. 파병 지원에 합격해 레바논 동명부대에서도 근무했는데 군대를 통해 국가 정체성이 확고해졌어요.”
2008년 10월 전역하고 곧바로 일본 선교사로 활동하는 부모님을 찾아갔다.
“아버지가 그사이 목사 안수를 받으시고 2004년쯤 어머니와 함께 일본 선교를 가셨어요. 두 분 다 일본어를 금방 배우셔서 한인교회에서 일본인 목회를 하셨지요. 10년 정도 선교사로 활동한 후 귀국해 어머니는 정신과병원을 재개업하시고, 아버지는 원목으로 일하면서 춘천의 탈북민들을 위한 교회를 시작하셨어요.”
일본에서 부모님과 함께 북한이 열린 상황을 예상하면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면 좋을까’를 논의하는 가운데 떠오른 것이 전쟁학이었다.
“북한이 열린다면 분쟁국가나 개발이 필요한 상황과 비슷할 것으로 생각돼 전쟁학으로 결정했죠. 제가 학부를 마친 킹스칼리지에 마침 전쟁학과가 있어서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세부 전공은 ‘분쟁 안보 개발’이었어요. 전쟁학을 개설한 학교가 드물어서 킹스칼리지가 그 분야로는 유명해요. 우리나라에서도 영관급 장교들이 유학을 왔었어요.”
대학원 다닐 때 잠깐 귀국해 한반도선진화재단에서 인턴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때 처음 우리 사회의 보수-진보 스펙트럼을 봤어요. 영국에서 인권을 생각하면 보통 ‘리버럴’을 떠올리는데 한국에 와보니 상황이 다른 겁니다. 한국은 학연·지연에 지역감정도 작용한다는 걸 처음 알았죠. 한국에 들어올 엄두가 안 나서 통일의 때가 올 때까지 해외에서 경험을 쌓기로 했어요.”
분쟁지역과 개발도상국에서 경력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에 2012년 국제구호개발단체에 취직해 아프리카 지역 담당으로 파견 나갔다. 민주콩고와 케냐 등지에서 3년간 일했다.
“2014년에 박근혜 대통령이 ‘통일은 대박’이라는 연설을 하셨어요. 당시 그 말이 굉장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정부 차원의 통일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청와대 직속 통일준비위원회가 신설되면서 분쟁안보 전문가 모집 공고가 떴어요. 때가 왔다고 생각해 월드비전에 사표를 내고 귀국했어요. 최종 면접까지 봤는데 떨어졌죠. 해외에서 공부한 사람이 아닌 한국에서 북한학이나 국제정치를 공부하고 한국 정치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던 거죠.”
바로 고려대학교 대학원 북한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했고 학교에 다니면서 한국 대학의 심각한 좌경화와 한국사회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보게 됐다.
“북한 동포의 손은 떨쳐버린 채 북한 정권의 손을 잡으려는 ‘촛불정권’에 크게 실망했어요. 통일이 오지 않는 이유는 한국 사회가 바람직한 통일을 위해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깨달았죠.”
한국의 대학 캠퍼스를 먼저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서울대에서 트루스포럼이 시작되었다.
“기독교 보수주의 가치관을 기치로 내건 트루스포럼이 전국 조직을 모집하고 있었는데 제일 먼저 제가 고려대 챕터를 시작하겠다고 나섰지요. 트루스포럼은 박 대통령 탄핵에 대한 부당성을 알리면서 유명해진 학생 보수주의 단체입니다. 제가 ‘촛불 정부’를 비판하며 붙인 대자보로 이메일이 300통이나 밀려들면서 고려대 트루스포럼이 자연스럽게 시작되었어요. 250통 정도는 고대 선배들로부터 온 격려 메일이었고 20통 정도는 학부생들이 보낸 협박과 조롱이었어요. 10통 정도는 ‘나도 보수인데 만나자’는 메일이었지요. 관심있는 친구들과 매달 서울대로 가서 모임도 하고 보수주의에 대한 공부도 시작했어요. 트루스포럼은 지금 전국 조직을 갖춘 큰 단체가 되었지만 고대는 제가 졸업한 뒤 아쉽게도 없어졌어요.”
2018년 ‘북한 김정은의 핵 심리’를 박사논문 주제로 삼고 ‘북한 핵은 북한의 수령-주체사상과 직결되어 있어 김정은 체제가 무너지지 않는 한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을 담았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과 직접 만나면서 분위기가 매우 들떠있을 때였다.
“북한하고 사이가 좋아지고 있는데 이런 논문을 쓰면 되냐고 다들 말렸어요. 남북경제협력이나 핵 폐기방안 등을 쓰라고 했죠. 제 논문을 소신대로 쓰면 취직을 못할 것 같았지만 생각이 안 바뀌더라고요. 대신 논문을 영어로 썼어요. 아무도 못 읽게 하려고(웃음).”
박사학위를 받은 후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갔다. 북한인권운동을 하다 만나 박사과정 때 결혼한 아내와의 사이에 아이도 하나 있을 때였다. 연세대와 하버드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일하던 아내가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박사과정에 합격하자 본격 외조를 결심한 것이다.
“아내가 다른 여러 대학에도 합격했는데 존스홉킨스를 택한 이유는 장학금과 생활비 등의 지원금이 가장 많은 데다 제가 활동할 수 있는 워싱턴 D.C.와 가까웠기 때문이죠. 미국에서 둘째가 태어나 두 아이를 키우며 외조를 열심히 했죠.”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아내가 버지니아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포스트닥) 1년을 마치기까지 총 5년을 외조했다. 아이들이 잘 때 틈틈이 책을 번역해 번역가로도 활동했다.
“트루스포럼에 있을 때 보니 보수주의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공부할 책이 없는 거예요. 그들에게 자료를 줘야겠다고 생각해서 처음 번역한 책이 《레이건 일레븐》이에요. 미국 대학교에 보수주의 동아리가 많은데 처음 보수주의를 접하는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책입니다. 한국 유명 출판사에서는 다 거절당했어요. 1인 출판사 ‘열아홉’을 운영하는 어린 친구가 용기내서 출판해줬는데 다행히 《레이건 일레븐》을 5쇄까지 찍었어요. 미국에서 5권의 책을 번역했는데 한국 청년들에게 보수주의를 알리는 리소스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만족합니다.” (3편에 계속) [이근미 작가]
*이 기사는 <신앙계> 지면에도 실렸습니다.
조평세
영국 킹스컬리지 런던(KCL)에서 종교학(B.A.)과 전쟁학(M.A.), 고려대학교에서 북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중동과 아프리카 등에서 유엔평화유지군 및 구호 개발활동가로 일했다. 보수주의 청년단체 트루스포럼의 연구위원을 역임했고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편집위원, 1인 싱크탱크 ‘1776 연구소’의 대표를 맡고 있다.
번역서 《레이건 일레븐》 《모든 사회의 기초는 보수다》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