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2 때 영국행, 911 테러에 영향받아 종교학과로 진학
런던에서 2002 월드컵을 단체 응원하다 '한국인'이라는 자긍심 생겨
유난히도 뜨거웠던 지난 여름, 53명의 청소년과 청년을 이끌고 현대 기독교 정신과 자유민주주의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대표 도시들을 탐방하고 돌아온 조평세 박사. 그는 보수 기독교계의 떠오르는 기대주이자, 1인 싱크탱크 ‘1776 연구소’의 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매우 독특한 이력을 지닌 인물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린이 선교사로 인도에 가 현지 선교사와 함께 살면서 마더 테레사 수녀가 운영한 칼리가트에서 봉사도 하고, 영국·케냐·한국·미국 등 여러 나라를 오가며 공부하고 경력을 쌓았다. 대한민국 땅에 완전히 정착한 것은 마흔 살이 된 지난해였다. 그가 이름도 생소한 어린이 선교사가 된 건 스스로의 결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춘천에서 열린 윤석전(연세중앙교회) 목사님 집회에 참석했는데 어렸지만 큰 은혜를 받았어요. 그래서 부모님께 선교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죠. 부모님이 매년 해외로 단기선교를 가시고 선교사님들을 집에 모셔서 대접하는 걸 보고 자라서인지 선교사가 낯설지 않았어요.”
북한 흥남 지역에서 미국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접한 고조부 때부터 6대째 신앙을 이어온 집안인 데다 정형외과 전문의와 정신과 전문의인 부모님은 병원 건물 4층을 선교센터로 조성해 여러 선교단체를 입주시킬 정도로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부모님이 춘천에서 100병상의 큰 병원을 운영하셨는데 1,2층은 병원이고 3층에 우리가 살 았어요. 사택을 한쪽 끝에 짓고 나머지는 특실 5개 조성했는데, 거기에 늘 선교사님들이 머무셨어요. 나중에는 5층을 증축해서 예배당도 꾸몄죠.”
리빙스턴과 슈바이처 전기를 읽고 아프리카로 보내달라고 계속 조르자 부모님이 여기저기 타진해서 아프리카보다 덜 위험하면서 아프리카와 비슷한 환경의 인도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아버지가 인도를 배경으로 한 ‘시티오브조이’라는 영화를 보여주셨어요. 인도 콜카타(구 캘커타) 슬럼가 이야기를 아름답게 그렸지만 무섭고 끔찍한 장면도 있었어요. 아버지가 ‘저렇게 위험한데 갈 수 있겠니’라고 하셨지만 영화를 보고 더 확신이 서서 보내달라고 했죠. 형이 있으니 나는 가도 된다고 생각했죠. 형은 부모님 옆에서 착실히 공부해 이비인후과 전문의가 됐어요.”
1995년 6학년 여름방학 때 부모님이 몇몇 교인들과 함께 정식으로 선교사 파송을 해주었다.
“저는 편도행, 부모님은 왕복행을 끊어 인도 콜카타에 있는 선교사님 댁에 도착했어요. 며칠 머물렀던 부모님이 한국으로 돌아갈 때 저는 고열로 누워있었어요. 깨어난 후 부모님이 한국으로 같이 돌아가자고 했지만 제가 남겠다고 했다는 말을 선교사님께 전해 들었어요.”
그로부터 5년간 인도에서 지냈다.
“선교사님을 따라 시골 빌리지에 가서 바이올린을 켜는 게 제 사역이었어요. 사람들이 벌떼같이 모여들면 선교사님이 메시지를 전하셨지요. 당시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죽음의 집’(칼리가트)에서 빈민들을 돌보셨는데 많은 사람이 자원봉사를 했어요. 방학 때면 저도 봉사하러 갔는데 미성년자여서 환자 돌보는 일은 못 하고 청소와 설거지를 했죠.”
1년 동안 함께 지낸 선교사가 귀국해 다른 선교사와 지내다가 마지막 2년은 학교 선생님 집에서 하숙했다.
“더운 날씨와 위생 때문에 몸에 종기도 생기고 여러모로 힘들었어요. 한국에 전화를 걸 때마다 울컥해서 말을 못이었어요. 부모님이 그만 돌아오라고 하셨지만 자존심에 버텼죠.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그때는 ‘선교사는 선교지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부모님이 목사님께 선교사로 나간다고 인사시키고 ‘어린이 선교사’라는 정체성을 심어주셔서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나님이 어린 자존심도 사용하셔서 저를 훈련시켰다고 생각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영국으로 갔다. 한국은 초등학교부터 검정고시를 봐야 한다는 말에 영연방 국가인 인도의 학제를 그대로 인정하는 영국으로 간 것이다. 영국에서 선교사훈련학교에 지원했으나 대학생 이상만 가능하다는 규정 때문에 떨어졌다. 캠브리지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런던에 있는 킹스칼리지대학교 종교학과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미국에서 911테러가 터진 거예요. 영미권에서 그 사건은 문명적인 충격이었어요. 인문계 진학을 계획했던 친구들이 갑자기 입대하거나 외교나 국방 관련 학과로 진로를 바꾸기도 했어요. 처음으로 시대적 흐름에 대해 생각하게 된 계기였죠. 신학을 하려다 이슬람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종교학을 하게 된 거예요.”
2002년 월드컵 때 한국 유학생들이 함께 응원하며 빨간 옷차림으로 런던 거리를 행진했다고 한다.
“그때 처음으로 제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초등학교 때 한국을 떠나서 저 자신을 그냥 ‘국제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911테러를 지켜보면서 국가 정체성을 되새기고, 월드컵을 통해 ‘한국인’이라는 자긍심도 생겼던 거죠.”
그즈음 TV에서 미국 부시 대통령이 책을 들고 있는 장면이 화제가 되었다.
“탈북해서 조선일보 기자로 일했던 강철환 씨의 책이 당시 영어와 불어로 먼저 나왔는데 그책을 부시 대통령이 들고 있었던 거죠. 제목이 《Aquariums of Pyongyang(평양의 어항)》이었는데 바로 그 책을 구입해서 읽었죠. 그때 처음 북한의 존재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됐어요. 어렸을 때 부모님과 함께 북한에 ‘복음 풍선’ 보내는 일을 종종 했지만 대학생이 돼서야 그 일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게 된 거죠. 나와 같은 언어를 쓰는 동포가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폐쇄된 삶을 산다는 걸 그제야 실감했어요. 그 책을 읽고 충격받아서 진로를 국방이나 외교, 또는 통일로 정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선교 사명도 다해야겠지만 어떻게든 북한과 관련된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거죠.” (2편에 계속)[이근미 작가]
*이 기사는 <신앙계> 지면에도 실렸습니다.
조평세
영국 킹스컬리지 런던(KCL)에서 종교학(B.A.)과 전쟁학(M.A.), 고려대학교에서 북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중동과 아프리카 등에서 유엔평화유지군 및 구호 개발활동가로 일했다. 보수주의 청년단체 트루스포럼의 연구위원을 역임했고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편집위원, 1인 싱크탱크 ‘1776 연구소’의 대표를 맡고 있다.
번역서 《레이건 일레븐》 《모든 사회의 기초는 보수다》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