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수집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하나둘 모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게 스며들어온 동반자가 됐죠.”
최근 ‘정범진의 필통 사랑’을 출간한 정범진 전(前) 성균관대 총장은 필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 16대 성균관대 총장을 지낸 그는 한국중어중문학회장, 한국중국학회장, 성균관대 중문과 교수 등을 역임했다. 정부로부터 청조근정훈장, 영주시로부터는 제1회 대한민국 선비대상을 받았다.
정 전 총장은 필통 수집가다. 특별한 취미생활이 없던 그는 1980년대 무렵 성균관대학과 자매 관계를 맺고 있던 대만의 국립정치대학 한국어문학과에 교환 교수로 파견됐다. 그는 책상에 어질러진 펜과 연필을 정리하기 위해 처음 필통을 구매했는데 시간이 흐르며 필기류가 늘어나자 자연스레 필통도 늘어난 것이 수집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그의 필통 사랑은 박물관 전시까지 이어졌다.
지난 2021년 경북 영주시에서 처음 문을 연 ‘모우재 박물관’은 정 전 총장이 평생 모은 약 4000권의 서적과 서화 그리고 600여 점의 필통을 전시하고 있다. 정 전 총장은 사비를 털어 박물관을 지었다고 한다.
그는 정년퇴직 후 자신이 모은 서적과 컬렉션을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아 한 공간에 모은 것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에 공개하자 주변에서 ‘필통 컬렉션이 가장 흥미롭다’며 필통박물관을 추천했다.
정 전 총장은 “필통은 상식이나 기술도 엿볼 수 있고 특히 나의 과거를 담은 소중한 추억이 담긴 물건”이라고 했다.
과거 스위스 취리히에 방문한 그는 이동 중 버스를 기다리며 약 10분의 시간이 생겼다고 한다. 당시 그곳에서는 벼룩시장이 열렸는데, 한 필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상인들도 정리를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버스 시간은 다가오고 마음이 급해진 그는 상인과 가격을 조금 깎아달라며 신경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버스를 놓칠 뻔했지만, 결국 가격을 깎아 필통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고 한다.
또 한번은 중국을 방문했는데, 피서지에서 우연히 한 필통을 발견했다고 한다. 호두 껍데기를 모아 만든 필통이다. 정 전 총장이 수집한 필통은 중국에서 수집한 것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중에서도 가장 애착이 가는 건 우리나라에서 수집한 필통”이라고 했다.
정 전 총장은 “대전의 한 특산품 판매에서 발견한 십장생이 새겨진 필통에 가장 애착이 간다”고 했다. 필통은 중국과 대만 등에서 수집한 것들이 정말 아름답고 기술도 좋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대전에서 수집한 필통의 십장생에 매료돼 가장 아낀다고 한다.
그는 “필통은 하나의 필기류를 넘어 철학과 사연을 담은 예술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수집이 아닌 단순히 정리를 하려 장만했지만, 지금은 내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내 일부가 됐다”며 “책에서 각 필통에 등급을 매기긴 했지만, 등급에 상관없이 모든 필통이 내겐 특별하고 소중한 사연이 담겼다”고 말했다. [김성태 마켓뉴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