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⓹ 내남편 이승만] 6·25 전쟁으로 대구까지 피난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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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⓹ 내남편 이승만] 6·25 전쟁으로 대구까지 피난가다
  • 이근미 작가
  • 승인 2024.03.12 11: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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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대구까지 내려건 건 ‘내 평생 최대의 판단착오’
프란체스카 여사(맨 왼쪽)는 한 인터뷰에서 "몸이 힘든 것보다 외롭고 서러운 시간들이 많았어요"라고 말했다. 

오랜 독립운동을 끝내고 국내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가 싶던 즈음 느닷없이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프란체스카는 매일 비망록을 기록했다. 비망록의 첫 부분은 이렇게 시작된다.
 
‘공산군은 6월25일 새벽 5시에 쳐들어왔다. 나는 이날 상오 9시에 치과에 갔고 대통령은 9시30분에 경회루로 낚시를 나갔다.’
 
6월27일 새벽 2시 신성모 국방장관과 이기붕 서울시장, 조병옥씨가 이 대통령에게 남하를 권유했을 때 “서울을 사수해야 해. 나는 안 떠나겠네”라고 말하며 화난 걸음으로 침실문을 닫고 들어갔다. 곧이어 따라 들어간 프란체스카가 “어려운 때 국가원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라가 위태롭다고 합니다. 수원으로 잠시 내려갔다가 곧 올라오시면 어떨까요?”하고 간곡히 말했다. 이 대통령은 아내에게도 화를 내면서 “그렇게 말한 사람이 누구냐?”고 소리 질렀다.
 
그때 경무대 경찰 간부가 청량리까지 적군이 들어왔다는 긴급 보고를 했고 신 장관이 “잠깐만 수원까지 내려가 주시면 훨씬 유리하게 싸울 수 있고 꼭 서울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라며 머리를 조아렸다. 다시금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간다는 긴급 보고가 이어지자 대통령 일행은 새벽 3시 30분 경무대를 떠나게 되었다. 경무대 금고를 다 털었을 때 5만원밖에 없어 그 돈을 가지고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5만원은 요즘 화폐가치로 따졌을 때 2만원 남짓한 돈이다.
 
6·25 전쟁이 나자 피난을 떠난 이 대통령이 녹음방송을 통해 특별담화문을 발표한 것 때문에 후일 많은 비판을 받았다. 대전에 도착했을 때 국민들을 안심시켜야 한다는 이철원 공보처장의 건의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다. 고심 끝에 서울 중앙방송국과의 전화 통화를 녹음해 6월27일 방송되었던 것이다. 대구까지 내려갔던 이대통령은 ‘내 평생 최대의 판단착오’라며 다시 서울로 올라오다가 전세가 악화되어 또다시 남하해야 했다.
 
프란체스카는 1983년 ‘여성중앙’과의 인터뷰에서 “몸이 힘든 것보다 외롭고 서러운 시간들이 많았어요. 모든 사람들은 심지어 각하마저도 제가 제 목숨이 아까워 피난가자고 말한 것으로 오해를 하더군요. 그땐 정말 서럽고 외로웠지요. 언제나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차를 탈 때면 대통령에게 날아오는 총탄을 막을 요량으로 오종종한 자세를 취하곤 했다. 까닭을 모르는 대통령은 그녀에게 “목숨이 그리도 아까우냐”는 핀잔을 주곤 했다.
 
대구에 피난갔을 때 조재천 경북지사 관저에 머물렀다. 대통령 부부와 정부각료 국회의원 등 70여 명이 함께 지냈다. 수발을 드느라 조 지사 부인이 유산을 하기까지 했다. 이 대통령은 부인의 일을 덜어 주기 위해 아침에 사과와 토마토, 날달걀을 먹고 모시옷에도 풀을 먹이지 않고 그냥 입었다.
 
일선 장병 위문을 가거나 피난민 수용소를 갔다가 때를 놓쳐 굶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를 대비해 프란체스카는 이 대통령 호주머니 속에 잣을 넣어주어 시장기를 면하게 했다. 경북지사 관저에 있을 때 이기붕 서울시장 내외가 잣 한 봉지를 구해왔다. 이 대통령이 답례를 하기 위해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대구 거리에 나갔다. 

참외 1000원 어치를 사면서 참외 장수에게 “덤으로 하나 더 주시오”하고 참외를 집으려고 하자 참외장수가 “싸게 드렸는데 덤까지 가져가면 순사가 잡아가요”하면서 대통령의 손에서 참외를 빼앗았다. 밖에서 돌아온 대통령은 아내에게 “참외 한 개 더 얻으려다 순사에게 잡혀갈 뻔했어” 하면서 허허 웃었다. 거적을 둘러 임시로 만든 화장실에 익숙지 않아 프란체스카는 간혹 대통령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전쟁 중에 물이 부족해 빨래도 물 사정을 봐가며 해야 했다. 홀로 내려온 정부 요인들과 비서관, 경호원들은 옷을 사 입을 형편이 못 되어 군복을 얻어 입었고 빨래도 손수 했다. 남자들이 해놓은 때가 덜 빠진 빨래를 보면서 프란체스카는 가슴 아파했다. 특히 팬티는 해어지기 직전의 천 조각에 불과했다. 프란체스카는 노블 참사관이 갖다준 침대 시트로 팬티를 여러 장 만들어서 직원들 숙소에 갖다 놓도록 했다. (계속) [이근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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