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타이핑으로 손끝 짓무른 비서 겸 독립운동가의 아내 프란체스카
신혼 초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 하루 한 끼 먹은 적 많아, 바나나와 날달걀로 식사 때우기도
미국시민권 받으라는 권유 받을 때마다 한국은 독립할 것이라 단언
이 박사가 “여자는 치마를 입는 것이 아름답고 건강에도 좋다”고 말해 프란체스카는 결혼 후 바지를 입지 않았다. 그녀는 후일 며느리에게도 되도록 치마를 입으라고 당부했는데 어쩌다 며느리가 바지를 입으면 ‘바지부인’이라고 놀렸다.
이 박사는 유머와 기지가 있는 명랑한 여성을 좋아하면서도 말없이 조용한 여성을 더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대통령이 되어서 동양에서 제일 먼저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는 운동을 시작했고 초대 내각에서 여성장관을 탄생시켰다.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도 여성 제자를 많이 길러냈다.
이승만 박사가 서양 여성과 결혼하자 독립운동 동지들과 동포들의 실망이 컸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자신의 저서 《대통령의 건강》에 당시 심경을 이렇게 밝혔다.
<사랑하는 가족과 동포들의 축복을 받지 못한 채 결혼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남다른 고충과 애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고생을 안해 본 나는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
결혼 후 가장 서글펐던 것은 하와이 동포들이 이승만 박사를 초청하면서 ‘혼자만 오시라’는 전보를 보냈을 때였다. 독립운동 동지들이 “서양 부인을 데리고 오면 모든 동포들이 돌아설 테니 꼭 혼자만 오라”는 전보를 두 번씩이나 보냈을 때 프란체스카는 “수심 가득한 친정 어머니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고 책에 당시 심경을 토로했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는 하와이에 아내와 동행했고 예상과 달리 부두에는 동포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 박사와 결혼한 서양 여자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하와이에 머무는 동안 동포들은 두 사람을 초대하거나 김치를 보내주기도 했다.
신혼 초에 이승만 박사 부부는 미국의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동포들을 방문했다. 연세대 유영익 교수는 “이승만 박사가 단순한 사랑이라기보다 독립운동 정치가로서 자기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을 오래 찾던 끝에 동반자 기준에 알맞은 여성을 찾은 것”이라고 분석하면서 “프란체스카는 망명정객에게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1940년에 이 박사가 태평양전쟁을 예고하는 《일본 군국주의의 실상》(Japan Inside Out)을 출판할 때 프란체스카는 세 번이나 그 원고를 타이핑하는 바람에 손끝이 터지고 짓물렀다.
비서 역할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의 아내로서의 역할도 만만치 않았다. 언제나 3등 열차나 3등 선실만 골라서 타고 다니는 남편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에 관해 불평을 말하는 일이 없었다. 신혼 초에 두 사람은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 하루 한 끼밖에 먹지 못할 때도 있었다. 프란체스카는 한 끼의 식사에도 감사하며 기도하는 남편이 측은해 목이 메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책에 기록하고 있다.
미국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독립운동하던 시절, 식비를 아끼기 위해 바나나와 날달걀로 끼니를 때웠다. 날달걀 먹는 것을 이상스럽게 생각하는 서양사람들이 많아 껍질을 종이에 싸서 버려야 했다. 워싱턴에 살 때 부부는 이웃집 고용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새벽 세 시에 일어나서 눈을 치운 적도 있다. 주변에서 주인이 직접 눈을 치우는 집이 없어 남들이 보지 않을 때 눈을 치웠던 것이다.
이 박사는 독립운동 시절 미국 시민권이 없어 곤란을 겪곤 했다. 미 국무성에 근무하던 시플리 여사는 비공식 여권을 만들 때마다 신경 쓸 일이 많다며 프란체스카에게 “남편이 미국시민권을 받도록 하라”고 권했다. 프란체스카가 시민권 얘기를 꺼내자 이 박사는 “한국이 곧 독립할 것이니 기다려 주시오”라고 말했다.
결혼을 하러 빈에서 미국으로 건너갈 때도 입국비자를 얻기 위해 고충을 겪어야 했다. 프란체스카는 자신의 저서 《대통령의 건강》에 ‘당당한 무국적자의 위엄과 민족적 자부심에 압도당했다’고 기술했다.
신혼시절 윤치영(뒤에 내무장관·서울시장·공화당 의장)씨 내외가 방문해 프란체스카에게 한복을 선사하였는데 그녀는 한눈에 한복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이 박사가 한복을 입은 모습을 몹시 흐뭇하게 생각하자 그녀는 그날 이후 생애 대부분을 한복 차림으로 지냈다.
그녀는 한국 음식을 배우는 데 매우 열정적이었다. 이 박사와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남궁염씨의 부인 조엔 남궁씨에게 김치 담그는 법, 콩나물 기르는 법, 찌개와 국 끓이는 법 등 한국요리법을 배우면서 한국의 예의범절과 명절 풍습도 익혔다. 얼마 안 가 프란체스카는 한국음식 솜씨로 방문객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며 동포 유학생들에게 김치를 담가 나눠주기도 했다.
시어머니가 새우젓 국물로 간을 맞추어 달걀찌개를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프란체스카는 달걀 프라이보다는 달걀찌개나 두부찌개에 새우젓 국물을 넣고 끓이는 때가 많았다. 결혼하고 처음 맞이한 남편의 생일날 프란체스카는 미역국, 잡채, 콩나물, 물김치와 함께 쌀밥을 차려 남편을 감격시켰다.(계속) [이근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