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역전승의 고전적 사례는,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이다. 트루먼의 역전승(逆轉勝)은 미국 정치사상 최대의 이변(異變)일 뿐 아니라 역전의 원리가 고스란히 다 들어 있는 사례이다. 모든 언론, 모든 여론조사 기관, 모든 정치인들이 공화당 후보 토마스 E. 듀이의 대승(大勝)을 예측했었다. 그해 9월 초 선거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듀이는 민주당의 현직 대통령 트루먼을 여론 조사에서 13%p(44 대 31)나 앞섰다. 갤럽, 해리스, 로퍼 등 여론조사 기관은 이런 시기의 이런 대차(大差)는 도저히 뒤집을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 투표일 수주(數週) 전에 여론조사를 중단하였다.
당시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선거운동이 하나의 의식(儀式)일 뿐 결과는 운동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이론을 믿었다. 선거운동 기간중에 지지후보를 바꾸는 유권자는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만약 여론조사가 투표일까지 계속되었더라면 그런 오판(誤判)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타임, 라이프 같은 잡지는 듀이의 승리를 전제로 한 기사를 준비하였다. 라이프는 선거 전의 마지막 호에서 듀이의 사진을 실으면서 “차기 대통령이 페리보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만(灣)을 지나고 있다”는 제목을 달았다. 시카고 트리뷴紙는 개표가 진행중일 때 1면 머리에 “듀이가 트루먼을 패배시키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어 희대의 오보를 하였다. 트루먼을 수행하는 기자들 중 그의 승리를 예측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트루먼을 더욱 어렵게 한 것은 민주당의 중진 두 사람이 탈당, 출마한 점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아래서 부통령을 지냈던 헨리 A. 월레스는 진보당을 창당하여 출마하였다. 그는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했으나 공산주의자들을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에 비교하는 등 매우 좌파적인 성향을 보였다. 1946년 트루먼 대통령은 자신의 반소(反蘇)정책에 반대하는 월레스 당시 농무장관을 해임하였었다. 1948년 선거에서 월레스는 트루먼의 마셜 플랜과 트루먼 닥트린 등 냉전(冷戰)의 기본 전략에 반대하였다.
현직 대통령이 野黨투사처럼 선거운동
한편 민주당의 우파(右派)인 남부 세력이 트루먼의 親흑인 정책에 반발, 주권(州權)민주당을 만들어 사우스 캘로라이나 지사인 스트롬 서몬드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 트루먼은 민주당에서 극좌, 극우 세력이 떨어져 나감으로써 큰 타격을 받은 듯하였다.
트루먼의 선거전략은 공격적이고 단순하고 인간적이었다. 그는 공화당이 상하원(上下院)을 지배, 사사건건 반대만 일삼아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유권자들에게 호소하였다. 현직 대통령이 야당투사가 된 것처럼 공화당의 의회를 때렸다. 이 전략이 대역전의 기본이 되었다.
트루먼은 원고도 보지 않고 공격적으로 연설하였다. 그는 미국 중부 농촌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을 다니지 않았다. 농사를 짓고 작은 상점도 경영한 적이 있었다. 1차 세계대전 때는 자원하여 장교로 참전하였으며 정치판에 뛰어 들어선 지역정치의 바닥에서부터 시작하여 상원의원까지 올라온 서민적인 사람이었다. 성격이 급하고 말은 솔직하였으며 인간성과 투지(鬪志)가 넘쳤다.
듀이는 반대였다. 뉴욕주 지사(知事)를 두번 역임한 그는 40대의 나이로 1944년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위협하였다. 변호사 출신인 그는 전형적인 동부 엘리트였다. 외모가 차갑고 딱딱하게 보였다. 선거 운동도 수세적(守勢的)으로 하였다.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당선된다는 생각이 그를 ‘재미 없고, 인간적으로 매력 없는 후보’로 만들었다.
듀이는 ‘여러분의 미래는 여러분의 앞에 있습니다’ 식의 하나마나한 연설을 하여 트루먼과 대조가 되었다. 양쪽에선 극장 용 홍보영화를 만들었는데, 여기서도 듀이는 인간미 없는 사람, 트루먼은 세계 지도자와 어울리며 뭔가 큰 일을 하는 사람으로 비쳐졌다.
유권자 14%가 선거운동 기간중 후보를 바꿔
여론조사나 언론의 판단과는 상관 없이 트루먼의 전국 유세는 많은 청중을 동원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가 농민 노동자 소상인 등 서민층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이 현장에서 드러났는데도 기자들은 냉담하였다.
11월2일 투표 날, 트루먼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트루먼뿐이었다. 부인조차도 남편이 질 것이라고 믿었다. 트루먼은 고향인 미주리주에서 투표를 마친 뒤 경호원들만 데리고 근처의 온천 휴양소에 가서 목욕을 한 뒤 일찍 잠에 들었다. 자정 무렵 트루먼은 깨어났다. 라디오를 트니 그가 전국(全國) 득표에서 크게 이기고 있었다. 그런데 진행자들은 “개표가 진행됨에 따라 듀이가 따라잡을 것이고 결국 이길 것이다”고 해설하고 있었다. 트루먼은 다시 잠에 들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라디오를 켜니 그는 전국 득표에서 200만 표나 앞서 있었다.
트루먼은 전국에서 49.6%의 득표율을 보였다. 듀이는 45.1%였다. 선거인단수(選擧人團數)에서 트루먼은 303표을 얻어 189표를 얻은 듀이에 대승(大勝)하였다. 사후(事後) 여론조사 결과 듀이를 지지하던 유권자들중 14%가 선거기간중 트루먼 지지자로 바뀐 것으로 나타났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승부를 건 트루먼의 공격적인 전략과 인간적인 매력이 그를 대통령으로 재선(再選)시켰다. 대중정치에서 후보의 인간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준 선거였다.
역전승의 가장 큰 수혜자는 한국인
트루먼 역전승의 큰 덕을 본 이들은 한국인이었다. 1950년 6월24일(미국 시간) 밤 늦게 트루먼 대통령은 주말(週末)을 보내기 위하여 고향인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의 자택에 가 있었다. 그때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북한 공산군의 전면 남침(南侵)을 전화로 보고하였다. 이튿날 애치슨이 다시 전화를 걸어 전황(戰況)이 불리해지고 있다고 하자 트루먼은 벌컥 화를 냈다.
“그 개자식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합니다.”
며칠 뒤엔 김일성의 남침을 ‘마적단 습격 사건’으로 규정, 유엔군 파병을 선언했다. 지금 한반도의 약 5000만 명이 그의 결단 덕으로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 미국은 한국에 파병할 아무런 조약상의 의무나 전략상의 이유를 갖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을 버려야 할 이유는 많았다. 그럼에도 트루먼은 스탈린과 김일성이 예상하지 못한 大결단을 내렸다. 1948년 대선(大選)의 역전승(逆轉勝)처럼 1950년의 파병(派兵) 결심도 그 원인을 트루먼의 인간성에서 찾는 것이 빠를지 모른다. 만약 그 자리에 냉정하고 계산적이며 신중한 토마스 E. 듀이가 앉아 있었더라면 ‘즉각 파병’의 결정이 떨어졌을까? 촌각을 다투는 위기 속에서 ‘신중한 결정’은 한국의 적화(赤化)를 의미하였다.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TV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