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면 트로트’라는 말이 실감나는 시절이다. 리모콘을 눌러대다 보면 10여 개 채널에서 트로트가 흘러나온다. 어른은 물론 어린이들까지 꺾기 신공을 발휘하며 무대를 휘젓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변방의 북소리쯤으로 여겼던 트로트가 그야말로 ‘음악 중심’에 우뚝 섰다. 유명 성악가, 뮤지컬 배우, 아이돌 가수도 트로트 가수로 전향하기 위해 경연대회에 출전할 정도다.
예전부터 불렀던 트로트가 갑자기 중심으로 부상한 이유는 뭘까. 경제성이 있기 때문이다. 가수 개인만 두고 봤을 때 경연대회 수상으로 나로호가 성층권을 뚫고 날아가듯 수입이 바닥에서 천상으로 수직 상승했다. ‘미스터 트롯’ 출전 당시 비좁은 방을 공개했던 임영웅이 불과 3년 만에 수십억 원짜리 펜트하우스로 이사한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실제로 각종 차트에서 트로트 가수들의 위용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세계 유일의 실시간 음악차트인 한터차트를 보면 트로트 가수 팬들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다. 솔로 가수들이 일주일간 음반을 판매한 기록인 초동지수를 보면 15위 안에 트로트 가수가 4명이나 포진하고 있다. 4위 임영웅(110만), 9위 김호중(68만), 11위 이찬원 (57만), 12위 김호중(53만), 13위 영탁(52만) 순이다. 임영웅보다 앞선 솔로 가수는 유명 그룹 멤버인 지민과 슈가(BTS), 지수(블랙핑크) 등이다.
트로트 가수들의 음반 판매가 강세를 보이는 이유는 팬층이 ‘두둑한 주머니’ 라인으로 불리는 중장년들이기 때문이다. “내 가수를 위해 여한없이 쓰겠다”는 각오가 팬카페에 넘쳐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인기 트로트 가수들은 광고시장에서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고 콘서트 티켓 예매가 하늘의 별 따기 보다 어렵다. ‘트로트를 들으며 심신을 안정했다’, ‘내 가수를 지지하다 보니 시름을 잊게 됐다’는 말은 자주 들어 식상할 정도다. 트로트 붐은 놀거리, 즐길 거리를 넘어서서 ‘위안의 장’이라는 큰 역할까지 담당하는 중이다.
재미있는 것은 많은 아이돌 가수가 트로트 가수를 만나면 ‘우리 부모가 팬’이라며 사인을 부탁한다는 점이다. 강다니엘은 임영웅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 엄마가 좋아하신다. 사인 좀 해달라”고 부탁했고 함께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려 양쪽 팬들에게 환호를 받았다.
트로트가 어느 순간 음악 중심으로 떠오르는가 했더니 세계로 뻗어가 글로벌 환호를 받고 있다. 외국 유명 차트에 진입하는가 하면 트로트 가수들의 해외 공연 티켓도 매진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젊은층들은 ‘부모님께 효도 하겠다’며 콘서트 예매 때면 그야말로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피켓팅(피가 튀는 전쟁 같은 티켓팅)에 뛰어든다. 험한 댓글이 달리기로 유명한 사이트에서 한 네티즌이 ‘임영웅이 너무 돈을 많이 벌어 배아프다’고 하자 오히려 ‘우리 엄마가 활기를 찾았으니 많이 버는 것 찬성’, ‘많은 사람을 즐겁게 하니 당연하다’는 훈훈한 댓글이 이어졌다.
트로트 열풍을 보면 ‘발상의 전환’과 ‘기획의 힘’을 새삼 깨닫게 된다. TV조선에서 시뻘건 옷을 입은 100명의 트로트 가수를 등장시켜 트로트 경연 개최를 알렸을 때 ‘시대를 읽지 못한다’며 혀를 끌끌 차는 이들이 많았다. 사실 나도 ‘저 빨간 옷 뭐야. 촌스러워’라며 채널을 돌린 장본인이다. 치솟는 인기에 결국 ‘방구석 1열에서 본방 사수’를 했지만. 이제 다들 환호할 곳을 찾지 못해 심심했던 중장년을 공략한 혜안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칼각 군무로 세계를 홀린 아이돌에 가슴을 후벼파는 트로트의 꺾기가 가세하면 K-팝은 도저히 뚫을 수 없는 방화벽이 될 게 분명하다. 트로트의 강세를 보며 아직도 심심한 이들은 누굴까, 사람들은 어떤 책을 기다릴까,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