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⑫내남편 이승만] ] 양자 맞은 기쁨 억누르지 못해... 한국 갈 여비 마련위해 이발도 하지 않아
상태바
[연재⑫내남편 이승만] ] 양자 맞은 기쁨 억누르지 못해... 한국 갈 여비 마련위해 이발도 하지 않아
  • 이사론 기자
  • 승인 2024.04.02 09: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양녕대군 종친회에서 추천한 이인수 씨를 양자로 맞아들이다
고국에서 김이나 마른반찬 보내주는 정성에 외로움 달래다
10달러 5달러 보내주는 미주 동포들의 온정 이어지다
1951년 프란체스카 여사 생일. 사진=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이승만 대통령은 6대 독자인 자신 때문에 고생하신 아버지와 임종을 하지 못한 어머니 얘기를 종종하면서 선영을 돌볼 아들이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두 사람은 의논 끝에 양자를 맞이하기로 하고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이순용 씨에게 부탁했다. 이 대통령은 “내가 이런 처지에 있는데 나에게 누가 아들을 줄 사람이 있겠는가” 걱정하면서 이순용 씨를 한국에 보냈다. 이순용 씨는 정부의 오해를 받아 한때 연금을 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 종친회로부터 이인수 씨를 추천받았다.
 
이 대통령은 아들이 온다는 소식에 매일 거울을 보면서 옷매무새를 살폈고, 아내에게 “그 녀석도 내가 저를 좋아하듯 나를 좋아하겠지?”하고 물었다.
 
1961년 12월13일 두 노인은 집안 테라스에서 양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기된 표정으로 아들 인수 씨가 마당으로 들어서자 이 대통령은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고 손을 흔들었다. 인수 씨는 층계를 올라와 큰절을 하였다. 대통령은 인수 씨의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프란체스카는 두 사람이 마치 오래 떨어져 있던 부자간같이 다정했다고 회고했다. 그녀는 아들 인수 씨를 맞으면서 이렇게 당부했다.
 
“무슨 말이든 반대하지 말고 순응하면서 기분 좋게 해드려라. 사실이라 하더라도 걱정끼치는 말은 하지 말아라. 고민하게 되면 건강에 나쁘잖니. 우리가 걱정한다고 해서 잘될 거 없으니까 속상한 말 말아라. 너도 늙으면 마찬가지다.”
 
이 대통령은 아들에게 궁금하던 고국 소식을 물었다. 이인수 씨는 “많은 사람이 열심히 하고 있으니 잘되어 갈 겁니다. 염려마십시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침통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잘되어 간다니 다행이야. 그런데 너는 남이 잘된다 잘된다 하는 소리 아예 믿지 마라. 이렇게 절단이 난 걸. 그렇게 우리나라 일이 쉬운 게 아니야.”
 
이인수 씨가 오던 날 친지들과 제자들이 김치를 비롯한 갖가지 한국 음식을 마련해왔다. 오랜만에 대통령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던 날이었다. 보행이 불편해진 이 대통령은 아들에게 많은 위안을 받았다. 이인수 씨는 아침마다 예의를 갖춰 문안인사를 드렸는데 이 대통령은 그 일을 무척 기뻐하였다.
 
설거지를 할 때 프란체스카가 그릇을 씻으면 그것을 받아서 이 대통령이 선반에 올렸는데 아들 인수가 하와이에 오고 나서부터 그 일을 대신 맡았다.
 
“어느 날 어머니와 그릇을 씻는데 날더러 ‘강석아 이거 올려놔라’ 하시는 거예요. 나를 강석이로 착각하신 거죠. 머릿속에 강석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많았던 것 같아요.”
 
매일 평온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이 대통령은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늘 마음이 불편했다. 아내에게 “내가 우리 땅을 밟고 죽는 것이 소원인데 여기서 죽으면 어떡해. 모두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말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이 대통령은 그즈음 자다가 벌떡 일어나 눈물을 흘리는 일이 많았다. 아들 인수에게 부디 남북통일을 이룩하여 황해도 평산의 선영을 꼭 찾아 자자손손 돌보도록 하라고 자주 당부했다. 아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나라 걱정에 격정을 이기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이인수 씨는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애국하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하며 위로했다.
 
이 대통령의 향수병이 점점 깊어갔고 가족들은 곧 한국에 갈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1961년 성탄절에 교포 김학성씨가 초청해 준 만찬회에서 어린이들을 보고 “나는 곧 한국 간다”고 자랑삼아 얘기해 사람들이 모두 웃기도 했다. 환국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자 최백렬 씨에게 “나를 20년간 여기다 붙잡아 둘 작정이냐, 나는 걸어서라도 떠날 테야”라며 신발을 찾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대통령은 여비를 최백렬 씨와 윌버트 최씨가 대주기로 했다고 누차 얘기해도 여비가 없어서 돌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돈을 아껴야 한다며 이발을 하지 않아 프란체스카가 집에서 머리를 잘라주어야 했다. 시장에서 식품을 사올 때 봉지가 크면 “귀국할 여비를 쓴다”며 나무랐다. 이 대통령이 물건을 구입하면 걱정을 많이 해서 일주일에 한 번만 식료품을 사러 갔다. 그때도 인수 씨가 뒷문으로 짐을 갖고 들어가고 프란체스카가 작은 봉지를 들고 가 대통령에게 보여주었다.
 
하와이에서도 프란체스카는 남편을 돌보면서 방문객들을 맞고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편지와 답장을 보내는 등 비서역할을 충실히 했다. 헤리스 목사, 밴플리트 장군, 화이트 장군 등 많은 사람들이 이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갔다.
 
고국에서 김이나 마른반찬을 선물로 보내주는 사람들과 10달러 5달러 보내주는 미주 동포들의 온정이 이어져 부부의 외로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주었다.
 
오스트리아의 프란체스카 집안에서 200달러씩 생활비를 보내주었으며 커다란 종이상자 두 개분의 옷을 부쳐주었다. 그녀는 이 종이상자를 개조해 옷장으로 썼고 그 종이옷장은 지금 이화장 전시관에 보존되어 있다.(계속) [이근미 작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