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太陽)에 바랜 역사(歷史)와 월광(月光)에 물든 신화(神話)는 다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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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太陽)에 바랜 역사(歷史)와 월광(月光)에 물든 신화(神話)는 다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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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10.23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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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Nobelprize·조갑제닷컴 홈페이지 화면 캡처

‘조갑제닷컴’에는 수준급 기사와 칼럼이 적지 않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원로 언론인 조갑제 기자가 운영하는 사이트다. 이 사이트는 이른바 포털 기사검색제휴 매체가 아니다. 네이버 등에서는 조갑제닷컴 기사를 접할 수 없는 이유다. 

23일 오전 현재, 조갑제닷컴 메인 기사로 ‘太陽에 바랜 歷史와 月光에 물든 神話는 다 소중하다!’가 올라와 있다.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역사와 문학’의 본질과 상관성을 묵상하게 하는 글이다. 주요 소재는 동아일보 논설위원이 쓴 칼럼. 조선일보 기자의 칼럼과 비교한 대목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한강의 작품에 일부 드러나는 ‘역사적 편협’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생각해보자는 차원에서 해당 글을 소개한다.

"10월16일자 동아일보 송평인 논설위원 칼럼의 제목은 '한강, 문학과 역사'이다.

칼럼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도 4·3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역사라면 제주 4·3이 공산주의자들의 경찰서 공격에 의해 촉발됐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전제한 뒤 이렇게 비판한다. <작가는 거두(去頭)하고 군경(軍警)에 의한 학살로 단도직입한다. 군경은 셰익스피어 비극 속의 맥베스 부인처럼 밑도 끝도 없이 처음부터 사악한 존재로 제시된다. 군경이 제주에서 특히 사악해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건 묻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작별하지 않는다’가 주는 감동은 같은 시대를 다룬 선배 작가들과는 달리 이념이 전면(前面)에 드러나지 않도록 하면서 학살의 고통으로 응어리진 한 가족의 상처를 가슴 아프게 그려냈기 때문이다>고 好評했다.
 
송평인 위원은 <문학의 기능 중 하나는 역사의 거대한 힘에 짓밟힌 피해자들에 대한 위로다. 그래서 문학은 역사의 기준으로 재단해선 안 된다. 다만 거꾸로 역사 역시 문학의 기준으로 재단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한강은 자신이 쓴 작품들로 인해 외국인들에게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답할 수밖에 없게 되었음도 상기시켰다.
 

송 위원은, 한강의 2017년 뉴욕타임스 기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한국전이 대리전이라고 말해버리는 것은 역사가들이 오랜 기간 실증적으로 밝히기 위해 노력해 온 공산주의자들의 전쟁 도발 책임을 도외시하는 무책임한 발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문학과 역사를 이렇게 구분한다.

<문학은 심정윤리의 영역이다. 착한 심정을 가진 사람들이 의도치 않게 잘못된 일에 엮일 때 안타까운 視線으로 바라봐주는 것이 문학이다. 반면 역사는 책임윤리의 영역이다. 의도만이 아니라 결과까지 따져 냉정하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 한국 현대사 인식에서 빚어지는 오류는 문학의 관용과 역사의 평가를 혼동하는 데서 비롯된 게 적지 않다. 문학은 평가로만 가득 차서는 안 되고, 역사는 관용에 쉽게 자리를 내줘서는 안 된다.>

송 위원은, 4.3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작별하지 않는다’는, 그 작품 속에서 주인공 ‘나’가 밝히고 있듯이 광주 5·18민주화운동 배경의 ‘소년이 온다’에서 시작된 국가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에서 나왔다고 평하고 이렇게 비교한다.
<그러나 4·3과 5·18의 국가 폭력은 큰 차이가 있다. 5·18은 그 저항이 궁극적으로 전두환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의 원동력이 됨으로써 승리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다. 반면 4·3은 그 저항이 패배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다. 4·3은 여수·순천 사건과 북한의 6·25 도발로 이어지면서 역사를 퇴행시키는 방향에 서 있었다.>

송평인 위원은 <우리나라에 한강 못지 않은 여성 작가들이 여럿 있지만 그가 한발 앞으로 치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여성 작가들과 달리 역사의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개인을 본격적으로 다뤘기 때문이다>고 했다. 송 위원은 이렇게 끝맺었다.

<나는 ‘채식주의자’에 대해서는 부커상을 수상할 무렵 그 파격적 소재와 형식, 그리고 번역의 훌륭함을 다룬 글을 쓴 바 있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는 상대적으로 익숙한 소재에 전개도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마지막에 지루함이 쌓아올린 압력이 빅뱅처럼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가슴을 아리게 한다. 다만 문학과 역사의 구분을 유지하는 것은 독자에게만큼이나 작가에게도 중요한 것이다. 특히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오른 사람에게는….>
 
지난 15일 조선일보 박돈규 기자는 <노벨 문학상 '편 가르기'는 그만하자>란 칼럼에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한국사회 일각이 한강의 소설을 둘러싼 왈가왈부로 소란하다. 어떻게 읽든 독자의 자유지만 픽션은 역사도 다큐도 아니다. 기뻐하고 축하해야 온당한 일인데 자신의 讀法과 역사의식을 강요하며 "당신은 좌냐 우냐?"고 묻는 야만을 목도한다. 편 가르기는 그만하자, 정신 건강에 해롭다. (중략). 잔칫상을 엎을 때가 아니다.>
조선일보 기자는 노벨 문학상을 국가 대표의 금메달 정도로 생각하는 듯하다. 축하를 강요하는 것은 미움을 강요하는 것과 같은, 양심의 자유를 위배하는 전체주의적 발상이다. 윤석열 정권 편에 서서 의료사태를 보도하는 바람에 의료대란의 주요 책임자가 된 조선일보와 의료사태 보도에서 비판정신을 잃지 않는 동아일보의 차이를 보는 듯하다.

李炳注 선생은 신동아에 연재한 소설 '山河'에서 "태양에 바래면 歷史가 되고 月光에 물들면 神話가 된다"는 名言을 남겼다. 그는 생전에 "역사는 산봉우리를 기록하고 나는 골짜기를 기록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역사와 문학의 기능을 서로 이해하면서 상호 존중하려면 공통 분모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역시 事實일 것이다. 문학이 역사를 다루는 순간부터 사실의 규제 하에 놓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한국의 발전과 북한의 몰락을 연구한 미국 경제학자 3명이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고 한국 현대사의 그늘을 천착한 소설가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한국 현대사의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낸 상이다. 한반도가 껴안고 있는 고민이 세계사적 의미를 품고 있다는 예이다. 그래서 太陽에 바랜 歷史와 月光에 물든 神話는 다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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