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현대사강의] 戰後70년, 피 묻은 자유! 이젠 자유통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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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현대사강의] 戰後70년, 피 묻은 자유! 이젠 자유통일이다!
  •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 승인 2023.07.11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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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급박한 상황에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는 가장 높은 수준에서 동서양의 교양을 두루 체득하고 통합한 이승만(李承晩)이란 거대한 인격체의 집약적 표현이다”
“한국인들이 지금 공짜로 누리는 이 자유엔 피가 묻어 있다. 수많은 세계(한국) 젊은이들의 피가! 세계시민 정신엔 희생이 따른다. 그런데 1950년의 한국처럼 싸우는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대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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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급박한 상황에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는 가장 높은 수준에서 동서양의 교양을 두루 체득하고 통합한 이승만(李承晩)이란 거대한 인격체의 집약적 표현이다. 가장 놀라운 점은 75세의 노인이 국가존망의 순간들 속에서 이렇게 따뜻하고 격조가 높으며, 넓고 깊고 단호한 생각을, 혼신(渾身)의 힘을 다해, 그러나 아름답게 표현했다는 사실이다.

세계시민 정신으로 마적단 습격 사건 진압!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급박한 상황에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는 가장 높은 수준에서 동서양의 교양을 두루 체득하고 통합한 이승만(李承晩)이란 거대한 인격체의 집약적 표현이다. 

가장 놀라운 점은 75세의 노인이 국가존망의 순간들 속에서 이렇게 따뜻하고 격조가 높으며, 넓고 깊고 단호한 생각을, 혼신(渾身)의 힘을 다해, 그러나 아름답게 표현했다는 사실이다. ‘세계정세를 가장 높은 수준에서 내려다 본 사람’이란 무초 대사의 평대로 이승만은, 이 전쟁의 대의(大義)를, '세계시민(citizens of the world)'이란 키워드에 담아 문학적으로 풀어간다.

“대통령님, 위대한 귀국(貴國) 병사들은 미국인으로서 살다가 죽었습니다만, 공산파쇼 집단(Comminazis)에 의하여 자유국가의 독립이 유린되는 것을 방치한다는 것은 모든 나라들, 심지어는 미국 자신까지도 공격받는 길을 터주는 길이 됨을 알고 애국심을 뛰어넘어 세계시민으로서 그들의 생명을 바쳤습니다”는 이 편지의 핵심적 메시지이다.
“These soldiers of your great country, Mr. President, have lived and died as Americans, but they have given their lives even beyond love of country as citizens of the world”는 게티스버그 연설의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이 나라는 하느님 아래서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인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절대로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처럼 사람들 입에서 회자(膾炙)될 만하다.

‘세계시민’이란 말의 족보를 찾아 올라가면 그리스의 디오게네스, 소크라테스, 네덜란드의 그로티우스, 아인슈타인과 만나게 되는데 구호성이 아니라 이승만처럼 현실 속에서, 그것도 세계적 전쟁의 현장에서 이렇게 적절하게 정치적으로 표현한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한다. 

'세계시민 정신'이란 공허할 수 있는 용어에 피가 통하게 하고 영혼을 불어넣은 것이다. 이승만, 트루먼, 유엔은 '세계시민 정신'을 피비린내 나는 전장(戰場)에서 구현하여 자유세계를 구하고 '악의 제국'을 무너뜨리는 기초를 놓았던 것이다. 윤석열(尹錫悅) 대통령이 취임사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세계시민 정신'을 강조하고 있는 배경에 그런 정신이 흐르고 있는 게 아닐까

트루먼 대통령은, 남침 소식을 접하자 김일성 집단을 '개자식'(sons of bitches)이라 욕하고는 유엔군의 기치 하에 참전을 결단한다. 세계시민 정신으로 처음 조직된 국제기구인 유엔이 그런 정신으로 군대를 보내게 되었다는 점을, 트루먼은 남침 나흘 후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한국은 유엔의 도움으로 세워졌습니다. 유엔 회원국들이 공인(公認)한 정부인데 마적단(bunch of bandits)으로부터 불법적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엔 회원국들은 한국에 대한 마적단 습격사건(bandit raid)을 진압하기 위하여 한국을 구원하기로 하였습니다.”

한국전에 대한 가장 완벽한 국제법적 정의(正義)이다. 트루먼은 김일성 세력을 '개자식', 북한군을 '마적단'으로 경멸할 뿐 아니라 '불법행위'임을 분명히 했다. 2017년 문재인이 유엔 총회에서 한국전을 설명하면서 남침을 '내전이자 국제전'이라고 왜곡한 데 생각이 미치면 치가 떨리지 않는가?
 
Comminazis
  
이승만은 이 편지에서 자유를 중심가치로 하는 '세계정신'를 기둥으로 하여 여기에 애국심과 반공정신을 연결시킨다. "(미국 병사들은) 공산파쇼 집단(Comminazis)에 의하여 자유국가의 독립이 유린되는 것을 방치한다는 것은 (후략)"에 나오는 생소한 용어 Comminazis는 이승만의 수준높은 지적사고(知的思考)를 보여준다. 이 무렵 공산주의와 나치즘을 똑같은 전제주의적 악(惡)으로 본 학자는 아우구스트 폰 하이예크, 문학가로는 조지 오웰, 외교관은 조지 케넌, 정치인은 처칠 드골 트루먼 아데나워 정도였고, 이런 생각을 'Comminazis'란 경멸적 단어로 공문서에 집어넣은 지도자는 이승만이 처음일 것이다. 그의 반공신념은 20세기의 위대한 사상적 각성을 반영하는 것인데 이를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은 신선하다.

이승만은 1920년대 이미 한국인으로선 처음으로 공산주의를 체계적으로 비판한 인물이었다. 그는 1945년 12월19일 저녁 7시30분 서울중앙방송국(KBS) 연설을 통하여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다. 하지 사령관의 미군정(美軍政) 당국은 공산당을 건국과정에 참여시키려 하였고, 트루먼 행정부도 아직은 대소(對蘇) 봉쇄정책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을 때였다. 이승만은 이 역사적 연설을 통하여 공산당 극렬분자들을 반역자, 매국노, 사대주의자, 거짓선동가, 분열주의자, 소련 간첩단, 사리사욕(私利私慾)주의자, 문명파괴자라고 정확히 규정하였다. 이 연설은 아마도 2차 대전 이후 정치 지도자가 한, 공산당에 대한 최초의 정면대결 선언일 것이다.

“양의 무리에 이리가 섞여서 공산명목을 빙자하고 국권(國權)을 없이하야 나라와 동족을 팔아 사리(私利)와 영광을 위하여 부언낭설로 인민을 속이며, 도당(徒黨)을 지어 동족을 위협하며 군기(軍器)를 사용하야 재산을 약탈하며, 요즈음은 민중이 차차 깨어나서 공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매 간계(奸計)를 써서 각처에 선전하기를 저희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요 민주주의자라 하야 민심을 현혹시키나니, 이 극렬분자들의 목적은 우리 독립국을 없이해서 남의 노예를 만들고 저희 사욕(私慾)을 채우려는 것이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본성이 민족반역자임을 강조한다.
“이 분자들이 러시아를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에서 떠나서 저희 조국에 들어가서 저희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다. 이 사람들이 한국 사람의 형용(形容)을 하고 와서 우리 것을 빼앗아 가 저희 조국에 갖다 붙이려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지 않는 것이니, 우리 삼천만 남녀가 다 목숨을 내어놓고 싸울 결심이다.”

이승만은 이 연설에서 공산주의와 싸우는 원리와 방법도 제시하였다.
“먼저 그 사람들을 회유해서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내용을 모르고 따라다니는 무리를 권유하여 돌아서게만 되면 함께 나아갈 것이오.”

그는 회개하지 않는 공산주의자들은 "친부형(親父兄) 친자질(親子姪)이라도 원수로 대우해야 한다.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애증(愛憎)과 친소(親疎)를 돌아볼 수 없는 것이다"면서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건설자와 파괴자는 협동이 못되는 법이다. 건설자가 변경되든지 파괴자가 회개하든지 해서 같은 목적을 가지기 전에는 완전한 합동은 못된다”고 좌우합작 노선을 거부했었다.
  
김일성 세력과 전체 한민족의 대결
  
이승만은, 트루먼에게 보낸 친서에서 공산주의를, "한국인의 전통이나 정서와는 전적으로 이질적인" 존재로서 "세계 공산주의자들이 우리나라의 가슴 속에 심어서 키워온 제국주의적 침략의 악성(惡性) 암세포"라고 단정한 뒤 획기적인 대전략을 제시한다. "소수의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든 한국인들은 그들의 조국에 충성"하므로 "이 전쟁은 南과 北의 대결"이 아니며, "우리나라의 半을 어쩌다 점거하게 된 소수의 공산주의자들과 압도적 다수의 한국인들(그들이 어디에 살든) 사이의 대결"이란 것이다. 

이 전략을 오늘에 적용한다면 김정은과 종북세력은 민족반역 집단이므로 한민족(韓民族) 가운데서 고립시켜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즉 '김정은 對 한민족'의 대결구도, 즉 '1 vs. 8000만'으로 만들면 백승백승! 이는 가짜 민족주의 노선으로 한국인들을 속이는 김일성 세력으로부터 '민족'이란 무기를 빼앗아 그들을 찌르는 차도살(借刀殺)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이를 오히려 통일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미국 대통령을 압박하고 있다. 그는 김일성 남침으로 38도선이 무의미해졌으므로 실지(失地)회복이 아니라 북진통일을 전쟁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이 대목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자료를 찾았다.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난중일기(亂中日記)'이다.
<7월18일: 대통령과 무초 미국대사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언쟁을 벌였다. 대통령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 내용 가운데 “우리 한국 국민은 공산군을 우리의 본래의 국경선인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으로 몰아낼 때까지 싸울 것을 다짐하고 있다”고 되어 있는 대목을 대사가 빼자고 하여 두 사람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무초 대사에서 편지 초안을 보여주고 의견을 구한 것으로 보인다. 대사는 당시 유엔군과 미국의 전쟁목표가 38도선 이북으로 북한군을 몰아내는 데 있는데 이승만이 확대된 목표를 제안하는 데 반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원문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이 직설적 표현을 누그러뜨렸지만 '북진통일'을 밀어붙였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은 맥아더의 인천상륙 작전 성공 이후 전쟁 목표를 북진통일로 수정했다가 중공군 개입 이후 사실상 '원상회복'으로 돌아갔고 이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반발을 불러 반공포로 석방, 미국의 이승만 제거계획 등을 거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 정리된다.

아이들과 장난치는 대통령
 
7월18일자 '프란체스카 일기'엔 동화(童話) 같은 장면 묘사가 있다.
<긴장과 초조가 고무줄처럼 팽팽한 하루하루 가운데 대통령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은 꼬마 친구들과 만나는 때였다. 대통령의 꼬마 친구는 조재천(曺在千) 경북지사의 두 아들로 일곱 살과 다섯 살 정도였다. 두 녀석은 대통령 임시 집무실과 지사 관저 사이의 담장에 얼굴을 빠끔히 내놓았다가 대통령에게 들켰다. 대통령은 “이 녀석들, 엄마 아빠에게 들켜서 혼나기 전에 냉큼 나한테 건너 오너라” 하고는 집무실에 숨겨주고 함께 노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지나간 신문과 달력으로 딱지를 접어서 함께 딱지치기를 하고 종이배를 만들어서 배를 띄우며 놀았다. 대통령은 딱지며 종이배 접는 솜씨를 미국에서 디프테리아로 죽은 친아들 태산이한테서 배운 것이라고 말했다.
   조 지사 부인이 담장 넘어로 이 같은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대통령은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쉬!” 하며 아이들을 놀라게 하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 이후부터 두 녀석은 대통령만 보면 쏜살같이 달려 와서 품에 안기곤 했다. 대통령은 다섯 살짜리를 더 귀여워했다. 하루는 이 녀석이 내 종아리에 간지럼을 태우자 대통령은 “라이벌이 생겼다”면서 농담을 했고, 이 녀석이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마미, 당신의 보이 프렌드가 왔어” 하며 환하게 웃었다. 대통령은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했다. 예닐곱 씩이나 되는 그 댁 아이들을 일일이 껴안고 귀여워했다. 그러면서, “지사는 복이 많은 사람이야!”를 연발했다. 그때마다 나는 죄스러운 느낌을 가졌다. 대통령은 이내 내 안색을 살피고는 “대한민국의 청년들이 모두 우리 아들이야. 마미는 수없이 많은 아들들을 두었으니 할 일이 많아”라면서 위로해 주었다.>
  
세계정신과 자주정신
 
이승만 대통령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구구절절 감사의 뜻을 전하지만 주권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선 양보하지 않는다. 그는 "한국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의 동의(同義)나 승인없이 한국에 관하여 장차 다른 나라나 국가그룹에서 결정하는 그 어떠한 협정이나 양해사항도 이를 구속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할 것입니다"고 최후통첩 하듯 했다. 李 대통령은 결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휴전 협상을 두고 미국과 충돌하게 되는데 그의 무례하게 보일 정도의 고집이 결국 한미동맹을 만들어냈으니 이승만 제거계획까지 검토했던 미국으로서도 다행이었다.

자신을 도와준 강대국과 맞서 주권과 자존심을 지킨 사례로는, 신라의 삼국통일 때 당(唐)에 대한 경우가 있다.

서기 660년 신라 태종무열왕 시절, 황산벌 싸움에서 백제 결사대를 무찌른 김유신(金庾信)의 신라군은 먼저 온 당군(唐軍)과 합류하기 위하여 당의 진영에 이르렀다. 당장(唐將) 소정방(蘇定方)은 신라군이 늦게 왔다고 신라 장수 김문영을 목 베려 했다. 김유신이 격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한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대장군이 황산의 싸움을 보지 못하고 늦게 왔다고 죄를 주려는 것인데, 나는 결코 죄 없이 욕을 당할 순 없다. 반드시 먼저 당군과 싸워 결판을 지은 다음 백제를 부수겠다.“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편은, 그렇게 말하는 김유신을 이렇게 묘사했다.
"김유신이 군문(軍門)에서 도끼를 짚자 성난 머리털은 꼿꼿이 서고 허리에 찬 보검은 저절로 칼집에서 빠져 나왔다.“

이를 본 소정방의 부장(副將) 동보량이 겁을 먹고 발을 구르며 말하기를 "신라 군사가 장차 변하려 합니다"고 하니 소정방은 김문영의 죄를 풀어주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傳)에는 그 뒤의 일을 이렇게 적었다.
<당나라 사람이 백제를 멸한 뒤 사비의 언덕에 군영(軍營)을 만들어 신라 침략을 음모하였다. 우리 왕이 알고 여러 신하를 불러 계책을 물었다. 다미공이 나아가 말하기를 "우리 백성을 거짓 백제의 사람으로 만들어 그 의복을 입히고 도둑질을 하려는 것처럼 하면 당의 사람들이 반드시 공격할 것이니 그때 더불어 싸우면 뜻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유신이 말하기를 "그 말도 취할 만하니 따르십시오"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당 나라 군사가 우리의 적을 멸해주었는데 도리어 함께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나"고 했다. 유신이 말하기를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어려움을 당하여 자신을 구원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대왕께서는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했다.
당의 첩자는 우리가 대비하고 있음을 알고 백제 왕, 신료 93명, 군사 2만 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소정방이 포로를 바치니 당의 고종은 위로한 뒤 "어찌 신라마저 치지 않았는가"라고 물었다. 소정방은 이렇게 말했다.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 그 신하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고, 아랫사람은 윗사람 섬기기를 부형 섬기듯 하니 비록 작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戰後 70년, 이젠 자유통일이다!
  
전성기의 세계최대 강국을 대표하는 장수가 신라에 바친 최고의 찬사이다. "신하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고"라는 대목은 근대적이다. 신하가 섬기는 대상은 임금보다 상위 개념인 나라(國)로 기록되어 있다. 요사이 문법으로 말한다면 대통령이 아니라 헌법에 대한 충성이다. 국가를 임금 위에 놓은 점에서 7세기 신라 지도층이 가졌던 국민국가적 가치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김유신과 이승만이 보여준, 당대 최강국에 대한 당당하면서도 유연한 자세는 정신면에서 우리 민족사의 두 정점(頂點)이고 서로 이어져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3세기에 걸친 동북아의 평화시대를 만들었고 한민족(韓民族)은 처음으로 일류국가를 건설, 고대사의 황금기를 누렸다. 7~9세기 경주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장안, 바그다드, 교토(나라)와 함께 세계 5대 도시였다. 일류국가는 과거에 일류국가였던 경험이 있어야 만들 수 있는데, 대한민국은 물질적 부문에선 조건을 갖추었으나 한미동맹에 너무 의존, 자주국방 의지가 퇴색하고, 지식인층은 조선조적 명분론과 사대주의 근성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여 전도(前途)를 낙관할 수 없다.

이승만은 나당(羅唐)동맹을 만든 신라의 김춘추(金春秋)처럼 세계적 관점에 서서 한반도 문제를 내려다 보면서 한미동맹으로 활로를 찾았다. 그 과정에서 김유신처럼 초인적인 자주정신을 보였다. 이승만과 신라 지도부는, 세계시민 정신과 자주정신을 유연하게 통합시켜 자유와 번영의 세상을 만들어낸 민족사 최고의 인물들인데 속 좁은 지식인들에 의하여 푸대접 받고 있다. 하인에게 영웅이 없다는 말은 영웅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인이 하인의 눈높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7.27 연설이 이런 문제들을 다 포괄하여 "戰後 70년, 이젠 자유통일이다"는 역사적 명제에 속 시원한 전망을 내어놓기를 기대한다.
  
피 묻은 자유!
  
이승만이 친서를 보낸 1950년 7월19일 트루먼은 라디오 텔레비전 연설에서 마치 화답하듯이 말했다.

“ 국은 작은 나라이고, 수천 마일이나 떨어져 있지만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든 미국인들에게도 중요합니다. 공산군의 침략행위는 자유와 평화 속에서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들고 싶어하는 자유국가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입니다. 정면으로 그런 도발을 하였으므로 우리도 정면으로 맞서야 합니다(This challenge has been presented squarely. We must meet it squarely.)
유엔과 회원국들의 행동은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자유세계는 불법적인 침략을 무력(武力)으로 응징할 것임을 명백히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군, 해군, 공군을 보냈습니다. 지금 이 전쟁에 걸려 있는 것은 세계의 평화와 미국의 안전이기 때문입니다. 공산군이 한국을 침략하였다는 것은 다른 나라에 대하여도 그렇게 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나는 자유의 대가(代價)가 매우 비싸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구애받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의 자유를 지켜낼 작정입니다. 우리를 위해서일 뿐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입니다. 창조주(創造主)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대로 살기 위하여는 자유와 평화가 필수적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우리를 인도한 신념이었고 다가오는 어려운 시기에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줄 신념이기도 합니다.”

이승만과 트루먼이 공유하였던 "자유수호의 세계시민 정신"은 자유가 제한될 수밖에 없는 전시(戰時)에도 실천되었다. 이승만은 "공산당과 싸워서 자유를 되찾겠다는데 언론자유를 제한할 수 없다"면서 검열제도를 폐지, 한국 언론은 전시 중에도 군대와 대통령을 비판하는 자유를 누렸다. 전시 중에도 면장까지 뽑는 최대 규모의 선거를 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휴전협상의 가장 큰 쟁점이었던 포로문제에서 인도주의적 원칙을 견지해 '본인의사에 따른 송환원칙'을 밀어붙였다. 이 때문에 협상이 지연되어 미군 전사자가 늘었지만 그는 이미 자유의 대가는 비쌀 것이라고 예견했었다. 

한국인들이 지금 공짜로 누리는 이 자유엔 피가 묻어 있다. 수많은 세계(한국) 젊은이들의 피가! 세계시민 정신엔 희생이 따른다. 그런데 1950년의 한국처럼 싸우는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대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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