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젊은 과학자상, 2016년 FILA 기초과학상, 2017년 8월 이달의 과학기술인상
2020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
서울대서 11년간 후학 가르친 뒤 2008년 고등과학원으로 옮겨
개신교 최대 기도 모임인 '2023 다니엘기도회'의 간증 무대에서 자신의 삶을 잔잔하게 고백한 김인강 고등과학원 교수의 인터뷰를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3차원 다양체의 위상수학과 기하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김인강 고등과학원 교수를 만났을 때 ‘겸손함이 온몸에서 배어 나온다’는 인상을 받았다. 메일로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포인트를 성공에 맞추지 말아달라’고 당부했지만 그의 이력을 보면 ‘성공, 최고’ 같은 단어가 저절로 떠오른다.
서울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인강 교수는 카이스트와 서울대학교에서 11년간 후학을 가르친 뒤 2008년 고등과학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부설기관인 고등과학원에서는 수학과 물리학, 계산과학 계통의 석학 20여명이 강의 부담 없이 순수과학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김인강 교수는 2011년 ‘젊은 과학자상’을 받은 데 이어 2016년 ‘FILA 기초과학상’ 2017년 8월 ‘이달의 과학기술인상’을 연이어 수상했다. 2020년에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이 되었다. 한림원은 과학기술분야에서 20년 이상 활동한 과학기술계 최고 석학들의 모임으로 대정부 자문과 연구, 다양한 과학기술진흥 사업을 수행하는 학술단체이다.
김인강 교수가 11세에 겨우 학업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면 누구나 놀라게 된다. 두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걷지 못하게 되자 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인강이 갖다 버려, 파묻어버려”라며 가족들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러 갔을 때 어머니 등에 업혀 “이렇게 불구가 심한 학생은 받을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6남매 가운데 막내였던 그는 어깨너머로 한글을 깨치고, 혼자서 계산법을 익혀 집안일 돕느라 바쁜 둘째 누나의 산수 숙제와 글쓰기, 그림그리기와 만들기를 도맡아 해주었다. 형과 누나들이 읽던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을 닥치는 대로 섭렵하며 어린 시절을 거의 방안에서 지냈다.
그에게 다가온 첫 번째 전환점은 둘째 누나가 마련해주었다. 누나의 후원으로 열한 살에 대전 성세재활원에 입소한 것이다. 3학년에 배정받아 치른 첫 시험에서 1등을 한 그는 친구들에게 산수를 가르쳐 주고 구내매점에서 계산을 도울 정도로 총명했다. 100여명의 원생이 단체생활을 하는 재활원의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지만 매주 자취방으로 데려가 씻겨주고 재활원 경비를 부담하는 누나와 논산 집에서 고생하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견뎌냈다.
하지만 자신보다 더 심한 장애를 가진 원생들과 부모에게 버림받아 시름시름 앓다 죽는 원생들을 보며 알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곤 했다.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예배에서 목사님이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신다”고 할 때면 ‘하나님이 계시면 어떻게 아이들을 이렇게 버려두시나’하는 생각에 반감만 들었다고 한다.
근육이 오그라들고 허리까지 굽었던 그는 힘든 재활을 거쳐 6학년 때 보조기를 끼고 목발을 짚을 수 있게 되었다. 매일 2㎞쯤 되는 둑길을 걷으며 보행 연습을 하였고, 그때부터 목발이 다리를 대신해주고 있다.
6학년 때 일반학교에서 자원하여 재활원으로 옮겨온 최화복 선생이 그에게 두 번째 전환점을 마련해주었다.
“외부에서 일반 학교 시험지를 구해와 저 혼자 시험 보게 했어요. 시험지마다 100점을 맞자 ‘너는 공부를 잘하는 재능이 있다’고 하시면서 일반중학교에 진학해 끝까지 공부하라고 하셨어요.”
누나는 진학보다는 재활원에 계속 머물며 기술을 익히라고 권했다.
“장애 때문에 취업이 어려울 테니 목각이나 인쇄, 편집 기술을 배워 자립하라는 얘기였죠. 어렸으니까 공부를 해야겠다는 각오 같은 건 없었어요. 최화복 선생님이 누나와 어머니를 설득해주셔서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죠.”
중학교에서도 “계단이 많아 이런 학생은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지만 최화복 선생은 “이 학생 안 받으면 후회할 거다. 얘가 나중에 학교 이름을 날릴 테니 두고 보라”며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김인강 교수는 두 자녀의 이름을 지어준 최화복 선생을 ‘가장 존경하는 최고의 스승’이라고 말한다.
대전중학교와 충남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는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하지만 현실은 암담하기만 했다. 집안이 가난한 것도, 아버지가 술 마시고 가족들을 괴롭히는 것도 여전했다.
“사회도, 내 인생도 부조리하다는 것과 함께 왜 태어나서 서로 정죄하며 살까, 그런 복잡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중고등학교 다닐 때도 불쌍한 재활원 친구들이 떠올라 대상이 없는 분노에 시달렸죠. 그러면서도 여러 사람의 희생을 딛고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생각을 하며 버텼어요.”(2화에 계속)
이근미 작가
문화일보로 등단. 장편소설 《17세》《어쩌면 후르츠 캔디》《서른아홉 아빠애인 열다섯 아빠딸》《나의 아름다운 첫학기》 비소설《+1%로 승부하라》《프리랜서처럼 일하라》《대한민국 최고들은 왜 잘하는 것에 미쳤을까》외 다수